24. 아마벨
청계산 입구 조선면옥 앞,
등산용품 좌판에 등산스틱 마개가 수북했다.
내 지팡이는 나흘께 갈아낀 마개도 이미 뚫려서
쇠꼬챙이가 밖으로 다 튀어나와
아스팔트를 짚을 때마다
화강암을 쪼는 정 소리가 났다.
한 짝당 오백 원.
지팡이 마개 두 짝을 갈고 한 쌍 더 챙겼다.
남은 거리가 얼마되지 않아 또 뚫릴 리 없겠지만,
여분이 생기니 확실히 마음이 놓였다.
안심하는데 고작 천 원.
흡족한 미소로 이천 원을
좌판 장수에게 건네며 슬며시 자랑했다.
"제가 광주에서 8일 동안 걸어왔거든요."
“경기도 광주가 아니라, 전라도 광주라구요?
와. 대단하네요.”
나는 그이도 무심한 도시에 적을 둔 사람이라
호응을 기대하지 않았지만,
그는 이천 원짜리 맞장구가 아니라
진실로 감탄했다.
내가 그이의 옆구리를 찔러 받은 인사지만
딴으로 쑥스럽고 고마웠다.
그이의 칭찬 덕에 굽은 어깨는 펴졌고,
축축한 걸음도 한결 산뜻해졌다.
사실 3시, 개포동 포이초교 앞에서 약속이 있었다.
일정에 맞추려면 첫날처럼
휴식을 줄여가며 걸어야 했지만 결국 못 지켰다.
수로에 빠지고, 허둥대다 길을 헤맨 바람에
한 시간 반이 지나서야 겨우 도착했다.
모임 막바지,
배낭을 멘 채 들이닥친 복면 쓴 침입자의 습격.
동그랗게 커진 동료들의 눈동자는
마스크를 벗어 수염 성성한 인중이 드러나자
그제야 웃었다.
도시에 잘못 출몰한 산적인 줄 알았다는 소회.
와인을 홀짝이며 이야기하는 사이,
내 손은 안주 접시를 분주히 들락거리긴 했지만
달콤한 향의 술은 일절 입에 대지 않았다.
아직 여행은 끝이 아니었으니.
7시, 성급한 겨울해가 진 자리를
가로등이 침착하게 밝히는 보도 위에서
사람들과 작별 인사했다.
언주로 북쪽으로 양재천, 매봉터널,
강남세브란스병원을 지나
센터필드 교차로(르네상스호텔 사거리)에 닿았다.
테헤란로.
큰 길을 따라 운집한 빌딩들은
강남, 서울 아니 이 나라의 우두머리가
바로 자신이라는 듯 앞다퉈 구름까지 치솟았다.
그들의 곤두선 대치는
아스팔트 도로가 까만 점으로 소실될 무렵까지
지리하게 이어졌다.
진회색 가로등주는 내 배낭에 매단 태극기보다
스무 배도 더 큰 깃발을 흔들어 젖히며
빌딩들의 싸움 몰이에 열중했다.
그 곁에 도열한 플라타너스들은
웅대한 빌딩의 기세가 마치 자신의 권세인 양,
아니 어쩌다 손끝에 쥔 권력을 잃을까 두려워
앙상한 가지를 하늘로 닥치는대로 뻗었다.
넓적한 잎사귀가 죄다 떨어져
온 몸뚱이에 형형한 버짐조차 가리지도 못하는
웃자란 나무의 행색이 한편 애처로웠다.
제 잘난 듯 뻗대다가
빌딩 간판을 가릴 만큼 비대해지면
결국 자신이 베어질 차례인 줄도 모르고.
압도적이고 고압적인 거대 도시의 밤.
나는 소실점의 한 축, 코엑스로 걸었다.
고장난 다리는 삐걱댔지만
타이레놀 두 알이면 제 역할을 하는데는 충분했다.
겨울밤 선릉역 1번 출구는
높은 빌딩들과 대비되게 이상하리만치 한산했다.
게다가 역에서 멀어질 수록
차 다니는 소리만 들리는 것이
고속도로 옆에 붙은 시골길 같았다.
그 때 길 옆에 큰 키에 기괴한 꽃이
나무가지 사이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수명이 다한 고철로 만든 그 꽃은
고약하게 생겨서는 화려한 서울의 중심과는
어디 하나 닮은 구석이 없었고,
어울리지도 않았다.
"너는 어째 여기에 있냐?"
나비는 커녕, 날벌레조차 찾지 않을 것 같은
쇳덩이 꽃에게 물었다.
그러자 바람이 일렁이더니
철판 꽃잎 틈새에 앉았던 눈덩이가
내 발 앞에 떨어지며 바스라졌다.
십 분 후, 근처 세븐일레븐에 다녀왔다.
그를 애워싼 하얀 유선형 콘크리트 화단 경계석,
가장 편평한 끝자락에 반투명 비닐봉투에서 꺼낸
서울 장수생막걸리를 올렸다.
돼지머리와 북어포 대신
편의점 편육과 먹태포를 놓고,
현금인출기에서 찾은 만 원권 다섯 장을
막걸리병으로 지질러 놓았다.
배낭 매듭을 풀어 무재해기와 태극기를
제수 음식 양 옆에 두니, 모든 준비는 끝.
스물부터 봤지만 아직도 낯선 서울을,
겨울을 겉돈 내 방식으로 맞을 셈이었다.
그런 면에서 녹슬고 외면받는 꽃은
내 여행과 닮아 보였다.
어떤 꽃도 어쨌든 꽃이니까.
아마벨. 그 꽃의 이름이었다.
질풍노도의 중년은
삼십 년 전 미국에서 공양미 오천석에 팔려 와,
한참을 못났다고 소박맞던 철의 요정에게
허리 숙여 절했다.
“무사히 마치게 되어 감사합니다.”
그 한 점의 순간만큼은 거만하게 솟은 빌딩,
바닥에 선명한 근육질 뿌리를 내린 플라타너스,
그 사이로 맹렬히 돌진하던 바람 역시
숨죽여 모두 나를 바라보았다.
추위에 탈진한 노숙자의 애달픈 정성이
그들의 언짢은 마음을 움직였을까?
밤은 몹시 찼지만
내가 선 바닥은 차츰 누그러졌다.
한 톨 염화칼슘이 혀에 닿은 듯
찝찔하고 씁쓸한 내 여행이
날 선 도시를 슬며시 녹이고 있었다.
끝.